콜로세움

네로 황제의 콜로수스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이 거대한 건물은 가로, 세로가 각각 190미터, 155미터에 이르며 4단으로 된 관람석은 4만 5천 개의 좌석과 5천 개의 입석을 갖추었다.
콜로세움에는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라리움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채광은 물론 환기구 역할을 했다. 관중은 지정된 입구를 통해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런 좌석 배정 및 출입 통제 방법은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그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 ‘콜로소(Colosso)'에서 따 온 것으로 이는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수스(Colossus)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형 원형극장은 로마에만 건설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님므, 아르르에도 있었고 로마인들이 진출한 독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는 물론 예루살렘에도 있었다. 예루살렘의 원형 극장은 헤롯 대왕이 건설했다.
콜로세움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라고 하였다. 콜로세움이 완공되었을 때, 기념 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 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콜로세움이 건설되었을 때 로마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해안으로부터 약 18마일 떨어진 티베르 강가에서 출발한 로마는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국가였다. 그러나 국토가 확장되고 외국의 노예가 들어오면서 로마인들은 노동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평원을 울리던 전투의 함성이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를 응원하는 아우성으로 바뀌었을 때, 로마의 진취적 기상은 이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로마는 게르만인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라고 했던 호라티우스의 예언은 콜로세움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동물 서커스

동물과 검투사의 결투원형극장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검투사들의 죽음의 결투, 동물들끼리의 잔혹한 싸움, 사형수나 무고한 기독교도들을 야수가 잡아먹게 했다는 으스스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 사실 자체는 모두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원형 경기장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동물들의 결투나 여러 동물을 갖가지 방식으로 짝지어 서로 싸우게 했다는 것은 매우 과장되거나 거짓말로 점철된 것이다. 왜냐 하면 그런 잔인한 묘사의 이면은 대체로 로마 문화의 윤리적 퇴폐를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만든 재미난 오락은 동물 서커스였다. 이 동물 서커스가 어느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지는 플루타르크가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동물 쇼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특히 동물들이 영특하다고 적었다.
사람들이 동물 위로 올라가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기도 하고 동물들이 직접 뒷발로 일어서거나 물 속에서 곡예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다표범이나 사슴, 영양, 원숭이, 개 등도 조련을 받아 각가지 쇼에 등장했다. 표범이 멍에를 지고 영양과 나란히 서서 수레를 끈다. 투기장에 끌려 나온 사자는 토끼를 사로잡아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아기 사자를 다루듯이 상처를 내지 않도록 그저 이빨로 살짝 몰고만 있어야 했다. 곰이 가마에 올라타면 네 마리의 코끼리가 네 사람의 온순한 노예처럼 자기 등에 이 가마를 태웠다. 표범, 곰, 이리 역시 이처럼 길들여 쇼에 내보냈던 것이다.
코끼리 공연은 특히 인기가 있었다. 코끼리들이 무릎을 꿇고 않는 모습, 무리를 지어 춤을 추는 모습, 식탁에 앉는 모습, 긴 코로 투기장의 모래 위에 그리스어나 라틴어 문자를 쓰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소(小) 플리니우스의 표현에 의하면 마구(馬具)를 단 길들여진 표범이 전차를 끈다든가 훈련된 코끼리가 황제의 관람석 앞에 무릎을 꿇고 코로 모래땅에 라틴어를 쓰는 등의 묘기를 보였을 때 관중들이 박수를 쳤다고 적었다.
물론 조련을 받아 온순해진 동물의 쇼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매력을 잃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다 자극적인 경기가 요구했고, 코뿔소와 코끼리의 싸움, 곰과 물소의 결투가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투는 특별한 축제에만 벌어졌다.

서커스에 쓰일 동물을 사냥하는 로마인들동물끼리의 싸움도 시시하게 느껴지자 인간과 동물이 싸우는 경기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사람은 보통 갑옷을 입지도 않았고 방패나 작은 칼만 갖고 싸웠다. 사람과 사자의 싸움은 인간이 주로 승리했으나 사자가 승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엄밀히 검토해보면 사람이 맹수와 싸운 것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 한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인간과 사자 싸움에서 인간이 주로 승리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기장에 나선 사람이 결투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중앙 정부로부터 요구받은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것은 수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터키의 일부인 킬리키아의 책임자를 지낸 키케로는 표범을 더 보내 달라는 독촉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의 항의는 사냥꾼들이 더 이상 동물을 사로잡는 데 투입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해받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어렵게 잡은 야수들을 하루에 수백 마리씩 살해했다면 몇 백 년 동안이나 그런 경기가 열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검투사들의 결투

검투사의 대결콜로세움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과 인간의 경기, 즉 검투사끼리의 경기를 연상한다. 검투사끼리의 목숨을 건 격투에 대해서는 많은 그림과 자료들이 있으므로 그런 사실 자체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흑인끼리의 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면 때론 여자와 난쟁이가 싸우기도 했다고도 한다.
악명 높은 갈리쿨라 황제가 살해되자 다음 황제로 추대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비인 멧살리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탕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왕비가 황비가 되기 전에 검투사 출신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포로, 노예, 죄인으로 훈련소에서 철저히 단련되었고 검투사들을 양성하는 전문 기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검투사가 모든 경기에서 ‘도 아니면 모’ 식으로 죽음의 결투를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류층 자제들이 원형경기장에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코모두스도 그런 예 중에 하나이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로 인정받기 위해 1천 회 이상 투기장에서 싸웠다. 그 중 355회는 아버지가 황제로 있을 때였으며 735회는 자신이 황제일 때였다. 그가 검투사와 싸워서 단 한 번도 살해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며 그렇다고 그와 결투한 상대자가 모두 살해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코모두스는 돈을 걸고 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결투에 나설 때마다 검투사들의 공동기금에서 50만 세스테르츠를 송금하도록 시켰다. 코모두스는 ‘로마의 헤라클레스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이 선망하던 당시의 유명한 검투사인 파울루스의 이름을 자신의 동상 밑에 새기기도 했다. 검투사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패배자가 항상 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로마에 남아있는 검투사가 직접 쓴 낙서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원형극장에서 20여 번의 결투에 참가했는데 6번을 패배했다고 적었다.
검투사들은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 출전하는 선수와 다름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검투사에 돈을 걸었다. 검투사들이라는 직업 자체가 로마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으므로 유능한 검투사는 매우 돈을 많이 벌었다. 실제로 검투사로서 성공하여 은퇴한 돈 많은 주인을 부러워하는 낙서도 남아있다. 폼페이의 건물들 벽에 씌여진 낙서에는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안족 출신의 검투사가 로마 여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적혀 있다.
사냥 풍경을 그린 어린이 방의 장식(4세기경)로마의 그림들을 보면 어른들이 사냥에서 황소나 코뿔소에 올가미를 걸었듯이 어린이들이 산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로마의 어린이들은 양이나 염소, 개가 끄는 2륜차를 타고 놀면서 전차 경주의 기수가 되는 것을 동경했다. 이것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당시의 검투나 경기가 모두 위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현재나 옛날이나 자식들이 모두 죽는다는 검투 경기에 참가하려고 연습을 한다면 허락할 부모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검투사들의 싸움이 죽음의 결투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성향과도 관련된다. 로마의 남자들은 상처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에서 패배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패배자가 비겁한 행동을 했을 경우에 한했다.
콜로세움에 물을 채워넣고 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기독교인들을 원형극장에 넣어 야수들의 밥이 되게 했다는 것도 사실 매우 과장된 것이다. 『쿼바디스』와 같이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콜로세움에 몰아 넣고 사자를 비롯한 야수들이 공격하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우선 콜로세움이 세워진 것이 기원 80년이라는 것은 『쿼바디스』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동물들이 살해하라고 만드는 것 자체가 그다지 자극적이거나 흥미를 끌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런 처형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기독교인들을 매다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고 생각했다.